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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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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03 07:10 조회1,3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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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가능하면 꽃밭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었으면 좋겠어
개울물 소리 졸졸 거리면 더 좋을거야

잠없는 나, 당신 간지럽혀 깨워
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길
풀숲에 달린 이슬 담을 병 들고 산책해야지
삐걱거리는 허리 쭉 펴보이며
내가 당신 하나 두울 체조시킬거야

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
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때
나는 당신의 아마에 오랫동안 입맞춤 하고 싶어
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

아주 부드러운 죽으로 아침식사를 준비할꺼야
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넣고
파릇한 야채 띄워 파릇한 야채죽으로 해야지
깔깔한 입이 솜사탕 녹듯 할거야
이때 나즉히 모짜르트를 올려 놓아야지

아주 연한 헤즐렛을 내리고
꽃무늬 박힌 찾잔 두개에 가득 담아
이제 잉크 냄새 나는 신문을 볼꺼야
코에 걸린 안경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

눈을 감고 다가 가야지
서둘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수 있어
강아지처럼 부벼볼거야 그래 보고 싶었거든

해가 높이 오르고
창 깊이 들던 햇빛 물러설 즈음
당신의 무릎을 베고 오래오래 낮잠을 자야지
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

어쩌면 그 때는
창 밖의 많은 것들 세상의 분주한 것들
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 아주 평화로울꺼야

나,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작은 토담집에 삽살개도 키우고 암탉에 노란 병아리도 키우고
조그만 움막하나 지어서 뿔 달린 하얀 염소 키우며
나 그렇게 한번쯤 살아보고 싶어

울타리 밑에는 봉숭아 나팔꽃 맨드라미 분꽃을 심고
집 옆 작은 텃밭에는 가지 오이 고추 열무 상추를 심어서
아침이면 싱그러운 야채로 음식을 만들고 싶어

봄엔 파릇파릇 쑥국을 끓여먹고
여름엔 머리에 잘 어울리는 풀먹인 하얀 모시옷을 입고
가을이면 빨간 꽃잎 초록 댓잎 넣어 창호지를 바르고 싶어
겨울이 오면 잠 없는 밤 눈오는 긴 긴 밤을
당신의 얼굴과 마주하며
다정한 옛이야기로 온 밤을 지새우고 싶어

나 늙으면 긴 머리 빗질해서 은비녀 꽃고
내 발에 꼭 맞는 하얀 고무신 신으며
가끔은 의자에 앉아 책을 보다가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고 싶어

한쪽 지붕에는 노란 호박꽃을 피우고
또 한쪽에는 하얀 박꽃을 피우며
낮에는 달 별 이슬 한 줌을 담아 마시면서
남은 여생을 당신과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어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봄이 오면
당신 연베이지빛 점퍼입고 나 목에 겨자빛 실크스카프 매고
이른 아침 조조영화를 보러갈까
"드라이비미스데이지" 같은 영화

여름엔 앞산 개울가에 당신 발 담그고
난 우리 어릴적 소년처럼 물고기잡고
물장난 해보고 그런 날보며
당신은 흐릿한 미소로 우리 둘 깊어가는 사람 확인할거야

가을엔 희끗한 머리 곱게 빗고
헤이즐럿 보온병에 담아 들고 낙엽 밟으러가야지
젊었을 땐 하지 못했던 사진 한 번 찍을까
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걸어 두어야지

겨울엔 당신의 마른 가슴 덥힐 스웨터를 짤거야
백화점에 가서 잿빛모자 두개 사서 하나씩 쓰고
강변 찻집으로 나가 볼거야. 눈이 내릴까?

그리고 서점에 가는 거야
당신 좋아하는 서점에 들려
책 한아름 사서 들고 서재로 가는 거야
지난 우리 둘 회상도 할겸
당신이 읽어주는 한줄 한줄에
난 푹 빠져 잠이 들겠지

난 당신 책 읽는 모습을 보며
화선지 속에 내 가슴 속의 당신의 모습을 담아
영원히 영원히 간직 할거야
그렇게 아름답게 날거가고 싶어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가고 싶어
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 울고 싶어
장작불 같던 가슴
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
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
사랑하기에 너무 벅찬 그 때
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꺼야

나 늙으면 그렇게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살다 때로 버거워지면
넉넉한 가슴에서 맘 놓고 울어도 편할 사람
만났음을 감사드리며

빨간 밑줄친 불치병 속앓이
털어 놓아도 미안하거나 부끄럽지 않게
마음나눌 사람 곁에 있음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요
살아 온 보람이며 살아갈 이유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고 가을 낙엽
겨울 빈 가지 사이를 달리는 바람까지 소중하고
더 소중한 사람 있어 날마다 기적 속에 살아가며

솔바람 푸르게 일어서는 한적한 곳에
사람둥지 마련해 감사 기도 드리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이렇게 살고 싶어

- 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 / 황정순 -

나 안늙어도 당신과 살아보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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